도반을 반듯하게 해주는 ‘칼 상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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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5-26 10:01 조회6,926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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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반 이야기 - 도반을 반듯하게 해주는 ‘칼 상우’ 스님
월간 불광 390호에 실린글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게제하였습니다.
주경 스님/서산 부석사 주지
1989년 가을 비구계를 받고 느지막이 해인사강원에 입방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구족계를 받기 전에 공부를 하는 곳이 강원이지만 가끔씩 나같이 늦깎이 학인들이 있었다. 출가 직후 바로 선방에 들어가거나 대학을 마치고 군법사로 입대하는 등 몇 년씩 시간이 지나서 강원공부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 법에는 승랍으로 좌차(座次)를 정하게 되어있지만 강원에서는 상반과 하반의 구별이 뚜렷하다. 그래서 강원생활 중에는 승랍보다 학년을 우선시한다. 100여 명의 대중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로 통일된 질서가 필요한 까닭이다.
흔히 “한솥밥 먹는다.”고 말하는 강원의 철저한 공동생활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4년을 함께하게 된다. 그야말로 부모형제도 떠나온 매정한 사람들의 새로운 인연이 싹트고 자라나는 소중한 시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출신지도 성격도 각기 다르지만 출가의 한 길을 걷는 도반으로 서로서로 의지하여 승가대중이라는 큰 바다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처음 방부를 드리려고 강당에 입방원서를 제출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비구계를 받고 늦게 온 데다 은사스님의 인연이 깊은 곳이라 불필요한 오해를 산 탓이었다. 같은 반 스님들에게 흔쾌하지 못한 첫인상을 주고만 것이다. 적지 않은 반대와 토론을 거쳐 산내암자에서 청강생으로 오고가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어렵게 허락을 받았다.
사실 강당의 가장 어려운 시기는 1학년인 치문반인데, 그 치문반의 고생이 거반 지난 뒤에 오는 뻔뻔함에 대한 심사 또한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도반들 중에 유난히 직설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던 사람이 상우 스님이다.
“나는 스님이 지금 이렇게 우리 반에 들어오는 게 달갑지 않아요. 내년에 아랫반에 들어오든지 하지 왜 지금 와서 여러 사람 불편하게 합니까?”
얼굴을 맞대고 하기에는 너무 냉정한 말을 굳은 표정으로 거침없이 쏟아내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스님이 대중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대중에 불편을 줄 것 같으면 언제든지 걸망을 챙겨서 떠나주기 바랍니다.”라고 아주 쐐기를 박았다.
새하얀 피부에 살이라곤 전혀 없이 바싹 마른 얼굴, 진지한 눈매와 늘 곧은 자세, 걸음도 행동도 똑 부러지는 형이었다. 그래서 도반들은 상우 스님을 ‘칼 상우’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지금도 정말 너무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책상 위의 경전은 늘 책상과 함께 잘라놓은 듯 각이 정확했고, 앉은 좌복 또한 주름진 곳 하나 없이 유지가 되었다. 혹 지나치며 관물장 안을 보게 되면 감탄사가 절로 날만큼 단정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상우 스님 스스로도 자신감이 당당했지만 주변의 누구라도 인정하는 모범적인 스님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우 스님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삭발이었다. 보름마다 서로서로 삭발을 해주는데 한 사람에 보통 5분 내외의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상우 스님은 그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 때문에 항상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리곤 했다. 평소 무릎을 꿇고 생활하는 시간이 많은 사찰생활이지만 세면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긴 시간 동안 삭발하는 건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해도 삭발이 매끈하지 않고,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으니 다들 상우 스님과의 삭발을 피하곤 했던 것이다.
작은 일을 하나 해도 준비와 진행, 마무리가 늘 분명하고 깨끗해서 오히려 답답한 느낌이 들 때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고 상우 스님한테 맡겨놓으면 정성을 다해 책임을 지고 일을 마치곤 하였다.
출가 전에 복사기회사에 다닌 인연으로 강원의 복사기를 관리할 때는 기계를 잘 모르는 스님들을 위해서 자세한 설명을 써서 붙였고, 늘 종이 한 장이라도 아껴 쓰기를 당부하고 스스로 먼저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한두 명 동지가 늘긴 했지만, 지대방에 앉아서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있던 사람도 언제나 상우 스님이었다.
“아직 학인이라 변변한 중노릇도 못하면서 시주물건을 함부로 쓰면 죄가 됩니다.”며 자신과 도반을 경책함에 쉼이 없었다. 오죽하면 상우 스님이 나타나면 다들 ‘착한 척’ 하곤 하기도 하였겠는가.
이제 강원을 졸업한 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상우 스님은 나름대로 융통성과 여유를 보인다고 하는데 우리 눈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스스로 초심으로 살아가고, 도반들도 그렇게 함께 가기를 늘 당부하는 상우 스님이 있어 정말 다행스럽다.
월간 불광 390호에 실린글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게제하였습니다.
주경 스님/서산 부석사 주지
1989년 가을 비구계를 받고 느지막이 해인사강원에 입방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구족계를 받기 전에 공부를 하는 곳이 강원이지만 가끔씩 나같이 늦깎이 학인들이 있었다. 출가 직후 바로 선방에 들어가거나 대학을 마치고 군법사로 입대하는 등 몇 년씩 시간이 지나서 강원공부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 법에는 승랍으로 좌차(座次)를 정하게 되어있지만 강원에서는 상반과 하반의 구별이 뚜렷하다. 그래서 강원생활 중에는 승랍보다 학년을 우선시한다. 100여 명의 대중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로 통일된 질서가 필요한 까닭이다.
흔히 “한솥밥 먹는다.”고 말하는 강원의 철저한 공동생활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4년을 함께하게 된다. 그야말로 부모형제도 떠나온 매정한 사람들의 새로운 인연이 싹트고 자라나는 소중한 시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출신지도 성격도 각기 다르지만 출가의 한 길을 걷는 도반으로 서로서로 의지하여 승가대중이라는 큰 바다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처음 방부를 드리려고 강당에 입방원서를 제출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비구계를 받고 늦게 온 데다 은사스님의 인연이 깊은 곳이라 불필요한 오해를 산 탓이었다. 같은 반 스님들에게 흔쾌하지 못한 첫인상을 주고만 것이다. 적지 않은 반대와 토론을 거쳐 산내암자에서 청강생으로 오고가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어렵게 허락을 받았다.
사실 강당의 가장 어려운 시기는 1학년인 치문반인데, 그 치문반의 고생이 거반 지난 뒤에 오는 뻔뻔함에 대한 심사 또한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도반들 중에 유난히 직설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던 사람이 상우 스님이다.
“나는 스님이 지금 이렇게 우리 반에 들어오는 게 달갑지 않아요. 내년에 아랫반에 들어오든지 하지 왜 지금 와서 여러 사람 불편하게 합니까?”
얼굴을 맞대고 하기에는 너무 냉정한 말을 굳은 표정으로 거침없이 쏟아내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스님이 대중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대중에 불편을 줄 것 같으면 언제든지 걸망을 챙겨서 떠나주기 바랍니다.”라고 아주 쐐기를 박았다.
새하얀 피부에 살이라곤 전혀 없이 바싹 마른 얼굴, 진지한 눈매와 늘 곧은 자세, 걸음도 행동도 똑 부러지는 형이었다. 그래서 도반들은 상우 스님을 ‘칼 상우’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지금도 정말 너무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책상 위의 경전은 늘 책상과 함께 잘라놓은 듯 각이 정확했고, 앉은 좌복 또한 주름진 곳 하나 없이 유지가 되었다. 혹 지나치며 관물장 안을 보게 되면 감탄사가 절로 날만큼 단정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상우 스님 스스로도 자신감이 당당했지만 주변의 누구라도 인정하는 모범적인 스님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우 스님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삭발이었다. 보름마다 서로서로 삭발을 해주는데 한 사람에 보통 5분 내외의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상우 스님은 그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 때문에 항상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리곤 했다. 평소 무릎을 꿇고 생활하는 시간이 많은 사찰생활이지만 세면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긴 시간 동안 삭발하는 건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해도 삭발이 매끈하지 않고,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으니 다들 상우 스님과의 삭발을 피하곤 했던 것이다.
작은 일을 하나 해도 준비와 진행, 마무리가 늘 분명하고 깨끗해서 오히려 답답한 느낌이 들 때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고 상우 스님한테 맡겨놓으면 정성을 다해 책임을 지고 일을 마치곤 하였다.
출가 전에 복사기회사에 다닌 인연으로 강원의 복사기를 관리할 때는 기계를 잘 모르는 스님들을 위해서 자세한 설명을 써서 붙였고, 늘 종이 한 장이라도 아껴 쓰기를 당부하고 스스로 먼저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한두 명 동지가 늘긴 했지만, 지대방에 앉아서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있던 사람도 언제나 상우 스님이었다.
“아직 학인이라 변변한 중노릇도 못하면서 시주물건을 함부로 쓰면 죄가 됩니다.”며 자신과 도반을 경책함에 쉼이 없었다. 오죽하면 상우 스님이 나타나면 다들 ‘착한 척’ 하곤 하기도 하였겠는가.
이제 강원을 졸업한 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상우 스님은 나름대로 융통성과 여유를 보인다고 하는데 우리 눈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스스로 초심으로 살아가고, 도반들도 그렇게 함께 가기를 늘 당부하는 상우 스님이 있어 정말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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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사야림님의 댓글
초사야림
불제자는 모름지기 칼을 한자루씩 품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타행 자신을 향한 사랑칼,존중칼..반야검,활인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