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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놀부, 정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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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5-26 10:04 조회8,1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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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반 이야기 - 자칭 놀부, 정암 스님



불광 394호에 실린글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게제하였습니다.

주경 스님/서산 부석사 주지





출가하여 1년쯤 지나고 있을 때였다. 산중생활이 익어지고 몸도 마음도 여유를 찾고 있었다. 승복이 몸에 잘 맞아가고 그렇게 편안한 하루하루일 수가 없었다. 염불도 잘 익어가서 어른스님들이 뒤에 계셔도 축원을 할 수 있을 만큼 힘이 붙어가고 있었다. 출가의 새 인연에 흠뻑 젖어들며, 속가의 옛 인연들이 멀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후배 한 명이 찾아왔다. 나중에 출가한 정암 스님이었다. 처음 얼굴을 보는 순간 무척 반가웠지만, 문득 한편으로 알지 못할 불안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학창시절에 늘 스스로 ‘놀부’라고 하던 대학 1년 후배였다.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진학했었는데, 고교시절부터 독실한 신행활동을 통해서 두루 능력과 신심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놀부라고 하듯이 괴팍한 구석이 있고, 말솜씨가 뛰어나 주변 사람들을 자주 골려먹곤 하였다. 토론과 대화에 상당히 자신이 있었던 나로서도 기상천외한 언어표현과 거침없는 행동의 그에게는 때로 선배의 권위마저 일부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암 스님은 속가시절부터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묘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왔다고 했는데, 곧이들리지 않았다. ‘혹시 출가를 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어떤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몇 달 뒤 정암 스님은 수덕사로 와서 출가했다. 그리고 같은 은사스님께 계를 받아 내 사제가 되었다.



자연계에 천적관계가 있듯이 사람 사이에도 그런 비슷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정암 스님과 나의 관계에 있어 거의 언제나 정암 스님이 주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때로 선배 대접을 잘 해주기도 하지만, 특유의 승부기질과 기발한 착상과 뛰어난 언어표현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처음 정암 스님이 수덕사로 출가했을 때, 은사스님이라도 다른 분을 모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인연이 그래서일까. 사형사제가 되었다. 아마 전생에 알지 못할 깊은 인연이 있었으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성품은 잘 변하지 않는 것일까. 정암 스님은 출가해서도 예의 ‘놀부’임을 감추지 않았다. ‘놀부 스님’으로 재탄생한 정암 스님은 자신의 괴팍스러움을 장점으로 살려 일처리가 똑 부러졌다. 계를 받은 그 해 여름부터 어린이법회를 조직해서 운영하고, 사무실의 일을 돕는 등 다른 스님들에 비해 눈에 띄는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대학생법회 출신이고 출가도 2년이나 차이가 났지만, 오히려 내가 도와주는 형편이 되었다. 사중에서도 ‘주경 스님 사제 정암 스님’이 아니라 ‘정암 스님 사형 주경 스님’으로 통할 정도로 활동이 두드러졌다. 승복을 조금 후줄근하게 입는 것을 제외하면, 염불과 의식은 물론이고 법회와 행사진행 등 두루 빠짐이 없었다.



그렇게 일년 정도 성심껏 사중에 봉사를 하고 승가대학에 편입을 해서 공부를 하러 떠났다. 당시 자신보다 출가가 훨씬 빠른 스님들과 함께 공부하면서도 정암 스님은 주도적으로 학습을 이끌었고, 교내의 소임도 솔선하여 맡았다고 했다. 졸업을 하고 곧바로 학교일을 맡아 그 활동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이때 학교일을 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적지 않은 장애와 고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정암 스님은 출가생활에 깊은 회의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출가인은 누구라도 장애를 만나게 된다. 그 장애가 병고(病苦)일 수도 있고, 이성(異姓)일 수도 있다. 또 나쁜 도반일 때도 있고, 금전이나 지위와 명예일 때도 있다. 어느 한 순간 아차 하는 사이에 번뇌에 휩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좋은 스승과 도반이 중요하다. 출가수행자의 삶에 온 생을 던진 초발심은 실로 귀한 것이지만, 한 번 깊은 회의와 번뇌에 휩쓸리면 숨쉬기조차 쉽지가 않다. 특히 10년이 안 되어 아직 수행의 힘이 익어지지 않았을 때는 더욱 그 번뇌를 이기기가 힘들다.



정암 스님도 출가한 뒤 장애 없이 몇 년 동안 잘 지냈었다. 무엇이든 뜻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었고, 속가에서부터 닦아온 재능이 충분히 빛을 발했다. 하지만 공부를 위해서라도 장애는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다. 정암 스님도 그런 장애를 만났던 것이다. 얼마간의 방황 끝에 도심의 포교당에 투신하였다. 그렇게 몇 해를 치열하게 도심에서 포교에 전념하며 장애를 극복해 내었다.



수덕사에 박물관을 건립하여 개관을 위해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정암 스님이 발탁되었다. 놀부 스님은 특유의 집중력과 끈기를 바탕으로 일을 추진하여 수덕사박물관을 사회적으로도 손꼽히는 박물관으로 성장시켰다. 얼마 전에는 교계박물관으로는 처음으로 관련분야의 상도 받았고, 최근에는 중국과 홍콩 등지의 국보급유물을 대여해 와서 주목받는 전시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가히 국립박물관에서도 진행하기 어려운 전시였다고 한다.



정암 스님은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 이 일을 하고자 한단다. 이제는 스스로 ‘놀부’라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지만, 정암 스님은 나에게는 영원한 ‘놀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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