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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가신 뒤에도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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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9-09 01:03 조회9,9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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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가신 뒤에도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 모습입니까?”
통도사 극락암 명정 스님이 은사이셨던 경봉 스님을 보내드리며 올린 마지막 질문이었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나무 빗장을 만져보거라.”
노사는 빙긋 미소지으며 이 한 말씀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그때가 1982년이었고 명정 스님과 경봉 스님이 만난 지 이십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도 다시 25년의 세월이 더해진 지금도 명정 스님은 경봉 스님을 모셨던 극락암에 그대로 머물며 은사의 뜻을 밝히고 있다.

명정 스님은 당신 이름으로도 이미 널리 알려진 선객이다. 또한 경봉 스님의 차맥을 이은 차의 대가이기도 하며, 글 또한 향기로워 많은 이들의 마음을 식혀주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수식보다 더 은은한 이름은 ‘경봉 스님의 상좌’라는 말이다. ‘경봉 스님의 제자’, 언제나 명정 스님은 그렇게 소개되어 왔다. 당신의 삶과 수행을 항시 스승에게서 찾고 스승에게로 돌려온 까닭이다. 은사가 남긴 가르침 또한 온전히 품어 시절 인연 따라 『경봉 스님 말씀 』, 『삼소굴(三笑窟) 소식』 등 여러 책으로 출판하여 경봉 스님의 빛을 고루 전해왔다. 거기에는 보태고 덜함이 없도록 애쓴 제자의 마음씀이 갈피마다 역력하게 배어있다. 무려 45년 세월을 그렇게 우묵하게 걸어온 것이다.

“스님은 왜 지금도 극락암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
“세간에서도 시묘살이 3년이면 장하다 합니다. 스승에 대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명정 스님에게 그렇게 물었지만 아무도 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금도 극락암을 찾는다. 그 하나의 이유는 경봉 스님의 빛이 여전히 성성한 까닭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제자의 수행과 향기가 남다른 까닭일 것이다. 거기에 노사를 기리는 제자의 마음, 그 뒤안길을 훔쳐보고 싶다는 욕심을 보태 극락암을 찾았다.

영취산이 마른 어깨를 드러내고 총총히 앞장을 섰다. 여러 개의 암자를 지나니 극락암이 소박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극락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대나무 빗장부터 찾아보았다. 어리석게도 ‘혹시 경봉 스님이 야반삼경에 만져보라던 대나무 빗장이 있지나 않을까?’, ‘명정 스님 손때로 닳아져 있지나 않을까?’ 그렇게 사제의 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예전 경봉 스님은 언제나 “여기 멀고 먼 극락까지 뭐하러 왔어?” 하며 극락암을 찾는 사람을 반겼다 하는데, 속된 마음으로 들어서니 극락에서도 극락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마음의 밑천이 야박하게 드러난다.

극락암은 경봉 스님의 성소로 스님이 대오를 이루고, 이후 40여 년 동안 주석하며 선풍을 떨쳤던 도량이다. 경봉 스님은 출가하여 10년 동안은 경학과 신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깨달음을 이룬 후에는 살아있는 자비보살로서, 눈밝은 스승으로서 ‘사바세계를 무대로 멋지게 살아가는 지혜’를 두루 일깨워주었던 어른이다. 당시 스님의 덕화를 입지 않은 이가 없었을 정도로 한국불교 근현대사에 스님이 남긴 족적은 크고도 깊다.

명정 스님과 경봉 스님의 인연도 이곳 극람암에서 맺어졌다. 당시 노사의 세수는 69세, 이제 막 행자를 마친 열여덟 살의 명정 스님을 노사는 무테안경 너머로 자상한 눈빛을 전하며 맞이해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제의 오랜 인연, 그 첫만남이었다.


“차렷! 열중쉬엇!”
명정 스님은 그렇게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느닷없는 호령에 의미를 파악하느라 눈과 마음이 바쁘게 돌아가는데, 정작 스님은 “히히히”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경봉 스님의 선기와 담력을 이었다는 주변의 말이 떠올랐다. 스님은 익숙한 손길로 차를 우려내며 이번에는 가까이 다가앉으라 정겹게 말을 건넨다. 만나자마자 할을 하고, 미소로 이심전심을 테스트하고, 그리고 마지막 설법으로 돌아온 듯하다. 마치 우리의 근기를 그대로 드러낸 듯했다.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뭉툭한 얼굴에 짓궂은 웃음을 띠고 스님이 말문을 먼저 열었다.

“스님! 경봉 스님 시봉하신 지 45년 세월입니다. 은사스님에 대한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잠시 스님의 차가운 눈길이 머물다 간다. “서둘지 마. 내가 찬찬히 이야기를 할 테니 들으려면 듣고 마음대로 써.” 그리고는 스님은 노를 저어가기 시작했다. 노를 젓되 서두르지 않았고, 이야기의 방향도 사뭇 다른 곳으로만 향해 갔다. 사회에서도 눈치보며 한다는 군대 이야기에서 한두 시간 머물다, ‘걸레 스님’으로 알려진 중광 스님과의 무용담에선 쿡쿡 웃어가며 한참 쉬고, 다시 천하장사에 버금갔던 젊은 시절의 호기며 에피소드까지 덧없이 들려주었다. 중간중간 몇 번이고 방향을 틀어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왜, 군대 이야기 싫어? 자네 나하고 군대 제대하려면 아직도 2년은 더 뛰어야 하는데, 할겨 말겨?”
농담이 묻어있는 듯 보이나 가슴 한 곳으로 서늘한 기운이 흐른다. 스님이 툭툭 던지는 말은 선구(禪句)라서, 말은 말이되 알아듣기 어렵고 대처하기도 대략난감 그대로였다.

어느새 해는 기울었다. 아침 11시부터 마주 앉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청해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은사스님에 대한 말씀만은 아끼고 마음 한 조각 보여주질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체념되어갈 무렵, 스님은 처소 옆방으로 안내했다. 경봉 스님의 유물을 모아둔 방이었다. 『삼소굴 소식』으로 출간되었던 경봉 스님과 당대 선지식들이 나누었던 낡은 편지들이 우수수 낙엽처럼 쌓여있고 벽으로는 글이며 그림들이 걸려있다. “이거는 만해 스님이 우리 스님에게 보낸 편지고, 이 편지는 한암 스님이 우리 스님에게 보낸 편지야.” 그렇게 말문을 열어놓고 스님은 저녁산처럼 고요해져만 갔다.

“우리 스님 열반에 드시던 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 이 좁은 도량에 3만 명이 넘게 모였으니까. 엉엉 울고 싶었는데 울 시간이 없었지. 인터뷰하랴, 손님 맞이하랴 종일 뛰어다녔지. 그러다 잠깐 짬이 나면 삼소굴 뒤에 가서 딱 두 번 엉엉하고 울다가 다시 나와서 뛰어다녔어.” 집에 돌아갈 차비를 쥐어주는 할아버지처럼, 스님은 서운치 않을 만큼 이렇게 딱 한번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스님은 은사에 대한 마음을 거듭 거듭 들려주었는지도 모른다. 군대 이야기며, 불사 이야기며 다른 것은 다 이렇게 말로 할 수 있어도, 그 마음만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5년 한결같이 지녀온 그 마음을 어찌 말로 하랴! 그렇게 스님은 말로 할 수 없는 간절한 그 무엇임을 에둘러 에둘러 일깨워주었던 것은 아닐까.

알듯 모를 듯한 감상에 젖어 밤 9시가 넘어서야 극락암을 나섰다. 어둠속에서 스님은 먼 모습으로 내내 서 있었다.

“대문 밖을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거라.”
경봉 스님이 늘 주셨다는 그 자상한 말씀이 듣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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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봉 스님 _ 1882년 출생.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계기로 발심, 이듬해인 1907년 통도사에서 성해 스님은 은사로 출가해 36세 때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득도하였다. 1953년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로 추대, 90세에 이를 때까지 승속을 차별하지 않고 활구법문을 갈파하였다. 한국 선종사에 두루 큰 족적을 남겼으며, 1982년 7월 17일 원적에 드셨다.

●명정 스님 _ 1943년 출생. 1959년 해인사로 출가, 1960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의 시자가 되었다. 1961년 경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40년 넘게 극락암 호국선원 등에서 정진, 현재 영축총림 극락호국선원 선원장으로 있다.

박연진 / 불교tv 방송작가 / 월간 불광 399호에 실린들을 옮겨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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